글을 쓰는 사람

이 페이지는, 이곳에 머무는 그림과 단어들, 생각과 이야기들 뒤에 서 있는 한 사람에 대한 작은 기록이에요.

그 사람이 바로 저예요.

저는 1986년 봄, 독일 북쪽의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어요. 열두 살 무렵부터는 너무 소란스러운 현실을 잠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 내며 또 다른 세계를 짜기 시작했어요. 조금 뒤에는 그 곁에 그림과 붓이 나란히 놓였고요.

열여섯 살에는 간호사가 되기 위한 길에 들어섰어요. 병원에서 사람들의 마지막 길을 함께 걷겠다고 스스로 선택했고, 그렇게 어른으로 자라나는 동안 그때까지의 취미들은 서서히 생활의 가장자리로 밀려났어요. 일이 제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제 안의 생기도 조금씩 잦아드는 것을 느꼈어요. 글을 쓰는 손은 뜸해졌고, 무엇보다 먼저 그림이 일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던 감각 자체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어요. 그때에서야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또렷해졌고, 서른이 넘은 뒤에야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처음 선택한 전공은 한국학이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다소 의외의 선택처럼 보였을지도 몰라요. 입학을 준비하던 즈음, 우연히 여러 대화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어를 제대로 의식하게 되었고, 그 낯선 소리와 리듬이 서서히 마음에 남았어요. 하지만 막상 공부를 시작하고 나니, 언어를 배우는 일은 제가 가장 능숙한 영역은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씩 드러났어요. 암기와 반복, 정확한 활용이 중요한 전공 안에서 저는 그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보다, 그 안에 깃든 구조와 결을 이해하고 싶어 했어요. 그러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늘 조금 모자랐고, 장래의 진로를 떠올리면 선택지도 그리 넓지 않았어요. 결국 전공을 옮긴 뒤 한동안 한국어를 완전히 내려놓았다가, 훨씬 나중에야 다시 돌아와 제 생각을 조심스럽게 옮길 수 있을 만큼, 천천히 관계를 이어 가고 있어요.

함께 공부하던 두 번째 전공은 비교문학이었어요. 이쪽 길은 제게 훨씬 자연스럽게 열렸어요. 다만 이 과정에서도 또 하나의 외국어를 택해야 했고, 저는 스페인어를 선택했어요. 그때 비로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어요. 저는 언어를 통해 말을 잘하기보다, 글을 읽고 맥락을 이해하고 세상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더 많이 기대는 사람이라는 점이었어요. 말하기의 자리에서는 쉽게 한 발 물러서는 제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어요.

결국 저는 한국학에서 철학으로, 거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전공을 바꾸었어요. 철학책을 오래전부터 파고들던 사람도 아니었고, 무엇을 배우게 될지 처음에는 거의 감이 없었어요. 그래서 시작은 서툴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발 디딜 곳이 생겼어요. 특히 언어철학 안에서 저는 스스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자리를 발견했어요.

비교문학에서의 경험과 나란히 놓이면, 텍스트 속의 상징과 모티프, 수사와 단어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어떤 의미의 공간들이 펼쳐지는지 생각해 보는 일이 제게 큰 즐거움이 되었어요. 그러면서도, 그 텍스트를 쓴 사람에 대해 성급하게 단정을 내리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었어요.

저에게 글 한 편은 하나의 독립된 존재처럼 느껴져요. 그 중심에는 분명 글쓴이가 숨 쉬고 있겠지만, 동시에 언어철학은 한 단어, 한 표현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얼마나 많은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줘요. 같은 단어라도 누군가에게는 이미지가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기억이나 전혀 다른 사유를 불러와요. 저는 바로 이런 ‘내부의 움직임의 차이’가 한 텍스트를 특별하게 만든다고 믿어요.

이런 경험들이 겹겹이 쌓이면서, 저는 사색의 바다라는 공간을 꿈꾸게 되었어요. 바쁜 하루가 모든 것을 덮어 버리지 않도록, 가끔은 무언가 창작이 허락되는 자리,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작은 만 같은 곳을요. 이 움직임들이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게도 전해져, 숨을 고르고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작은 파도소리로 남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해무는 차가운 바다 위에 얇은 장막처럼 깔렸다가, 금방 사라졌다가 하는 바다 안개예요.
선명하던 윤곽이 잠시 흐려지는 그 순간, 잔잔한 물결 위를 떠다니는 안개 속에는 말로 다 닿지 않는 아련한 그리움이,
거의 들리지 않는 속삭임처럼 스며 있어요

메레스네벨 (Meeresne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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