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조각들
드디어 그 오래된 거목이 눈에 들어왔다. 어릴 때부터 줄곧 이 산마루에 서 있던 나무였다. 여기서는 분지에 자리한 소도시를 볼 수 있었다. 그 거대한 파수꾼의 갈라진 나무껍질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나무줄기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몸을 낮춰 앉았다. 무릎을 두 팔로 끌어안고 한동안 소도시를 바라보았다. 어제까지 며칠 동안 사정없이 내린 비에 흙은 아직 축축했다. 어릴 적 방학이면 자주 찾던 그곳이 눈물 너머로 흐려졌다.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한 생이 남긴 빈자리는 그 삶만큼이나 무거웠다. 눈을 감고 어린 시절부터 변함없어 보이던 옛집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는 늘 그곳에 감돌던 익숙한 냄새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멈춰 있었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가자 갈색 문 위에 걸린 자수 그림이 반겨 주었다. 문을 열었다. 기억하는 한 늘 그 자리에 서 있던, 짙은 빛깔의 커다란 목제 시계는 침묵하고 있었다. 시계는 이미 고장 난 지 오래였다.
느린 걸음으로 거실로 향했다. 아침이면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아침을 먹던 곳이었다. 셋이 둘러앉던 작은 식탁은 어느새 한쪽 창가에서 다른 쪽 창가로 자리를 옮겨 있었다. 그런데도 그 순간만큼은 할아버지가 그 식탁에 앉아 손녀와 함께 아침을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레몬을 넣은 홍차 향이 코끝에 스며들었다. 이내 냉기가 다시 방 안을 감쌌다.
책장 앞에 놓인 크고 묵직한 윙백 안락의자에 시선이 머물렀다. 할아버지는 저녁마다 그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클래식 음악을 듣곤 했다. 맞은편에는 할머니가 앉아 흰 천에 작고 알록달록한 그림을 수놓곤 했다. 할머니는 손녀에게도 수를 가르쳐 주려고 몇 번이나 애썼다. 하지만 번번이 허사였다. 그 손녀가 바로 자신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창가의 양탄자에 누워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쪽을 더 좋아했다. 그러면서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할아버지는 그 음악에 대해 들려줄 이야기가 늘 많았다. 몇 음만 듣고도 작곡가가 누구인지 알아맞히곤 했다.
애써 기억을 떨쳐 내려 했다. 거실을 나와 좁은 복도를 천천히 지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작고 밝은 색의 나무 식탁은 여전히 창문 앞에 놓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비어 있는 새집이 보였다. 여러 해 동안 그 새집에는 작은 새들이 둥지를 틀곤 했다. 할아버지는 늘 그 둥지를 지켜 주었다. 매끄러운 식탁 표면을 부드럽게 쓸어 보았다. 할머니와 그곳에서 자주 보드게임을 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면 라디오에서는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창문 맞은편 벽에는 찬장과 냉장고, 레인지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할머니는 전자레인지로도 여러 음식을 더 빨리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 레인지 앞에서 자주 음식을 만들었다. 잠시 부엌 안이 갓 만든 초콜릿 푸딩과 바닐라 푸딩 냄새로 가득한 것 같았다.
다시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돌아가 좁은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위층에는 잔디밭 같은 초록색 카펫이 여전히 깔려 있었다. 계단 옆 방 한구석에는 삼촌이 할아버지와 함께 정성껏 만든 오래된 대형 철도 모형 디오라마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작은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두 개의 흔들의자가 작은 텔레비전 앞에 놓여 있었다. 마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무언가를 보러 계단을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앉아 있었던 적은 드물었지만, 그 저녁들은 또렷이 기억났다. 흔들의자에서 침낭 속에 포근히 몸을 파묻고 있던 할머니와 그 옆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
텅 빈 흔들의자에서 시선을 거두고 어릴 적 방학 때 잠을 자던 삼촌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늘 있던 자리에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먼지만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다. 매트리스는 여전히 경사진 천장 아래 구석에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작은 협탁이 있었다. 협탁 위에는 카세트 플레이어와 어린이 이야기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들이 많이 놓여 있었다.
잠자리에 누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기억이 떠올랐다. 테이프가 끝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평소에는 잠들 때 소리가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 이 집의 정적은 으스스했다. 이제는 이 집이 얼마나 더 조용해질 수 있는지 알았다.
지붕에 난 창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던 때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문 맞은편에 있는 다른 창문으로 다가갔다. 이웃집들의 지붕 너머로 시내 중심에 있는 오래된 교회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소리가 집 안의 무거운 정적을 채웠다. 오래된 교회의 종이 정각을 알렸다. 잠시 꼼짝 않고 서서, 어린 시절 이 창가에서 셀 수 없이 들었던 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지막 종소리가 잦아든 뒤, 집 안의 정적이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억 속에서보다 더 크게, 더 숨 막히게 들려왔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더 이상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제야 뼈아프게 와닿았다. 황급히 집을 나서서 방학 때 혼자 자주 찾아갔던 곳으로 향했다.
등을 파고드는 거친 나무껍질의 감촉에 문득 정신이 지금 이곳으로 돌아왔다. 산마루 아래로 도시가 펼쳐져 있었고, 집들의 지붕 사이로 오래된 교회 종탑이 솟아 있었다. 교회 종소리가 다시 울리자 두 팔로 무릎을 더 꼭 끌어안았다. 시선은 할머니와 함께 걸었던 길들을 따라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떠오르는 기억 속 장면들을 떨쳐 내려 하지 않았다.
할머니와 함께 개울 속 무지개송어를 바라보던 개울가의 작은 길. 하얀 집을 지나던 길. 그 집 옆 푸른 풀밭에서는 거위와 양들이 함께 거닐고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우던 기억도 떠올랐다.
수영장 잔디밭에서 밟았던 엉겅퀴를 떠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발바닥에 느껴졌던 아픔. 그리고 다정하게 달래 주던 할머니. 그러다 결국 둘이 함께 그 작은 엉겅퀴를 두고 웃었던 기억. 그런 날들에는 감자튀김도 빠지지 않았다. 그 뒤로는 어디에서 감자튀김을 먹어도 그 수영장에서 먹던 맛이 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던 산책길도 떠올랐다. 수영장 근처에서 개울물이 소리 내어 쏟아지는 작은 폭포를 지나던 길이었다. 개울물 속에서는 작은 물고기들이 반짝이는 별처럼 빛났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차고 벽에 걸려 있던 낡고 덜컹거리는 자전거를 내려 주던 일이 떠올랐다.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자신을 할머니가 뒤에서 바라보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 자전거 때문에 생긴 흉터도 몇 개 있었다. 지금도 차고 벽에 걸려 있는 어린 시절의 한 조각.
자신이 찾아왔을 때의 일을 할머니가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언제나 제시간에 집에 돌아와 놓고는 아래층 현관문 앞에서 가장 친한 친구와 한 시간이나 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고. 그러다 결국 할머니가 인터폰으로 이제 들어오라고 부르곤 했다.
하나둘 떠오르는 그 모든 기억 속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잠시 다시 곁에 계신 것만 같았다. 마음은 두 분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 모든 아픔 곁에 함께했던 시간에 대한 감사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는 너무나 당연하게만 여겼던 그 모든 순간에 대한 감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