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와 현실 사이에 놓인
영혼
얼마 전, 누군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내가 쓰는 산문 속에는 나 자신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 내가 ‘나에 대해’ 쓰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지어내는 것인지. 그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단순해 보였지만,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자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공간으로 나를 데려갔다.
물론 내 이야기들 속에는 내 삶에서 곧바로 가져온 것들이 있다. 마야처럼 행동하던 한 마리의 암컷 개도 실제로 있었다. 이름은 달랐지만. 친구도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정말로 예술가였다. 전시회가 있었고, 그림들이 있었고, 작업실도 있었다. 그러나 그 개가 그림을 망가뜨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장면은 온전히 상상 속에서 태어났다. 한 사람을 바탕으로 삼아 그 곁을 따라 걷다가, 어느 지점에서 방향을 틀어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된 것이다.
„겨울 빛 속의 집“도 비슷하다. 우리는 큰 친구 모임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함께 트리를 장식하고, 닭을 구워 먹는다. 그리고 그렇다, 나는 그 모임에서 언제나 가장 작은 키다. 하지만 매년 색깔과 맞지 않으면서도 꼭 가지 하나에 달리는 그 파란 유리 구슬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많은 작은 기억들이 응축되어 만들어 낸 하나의 그림, 하나의 상징이다.
이렇게 작가는 언제나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작품 속에 섞여 들어간다. 때로는 눈에 잘 띄고, 때로는 거의 알아볼 수 없다. 많은 소설 속 인물들은 우리가 실제로 만났던 사람들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몸짓, 말투, 웃는 방식이나 침묵하는 태도를 빌려 준다. 한 사람에게서는 성격을, 다른 사람에게서는 웃음을, 또 다른 사람에게서는 직업을 가져온다. 겉모습은 완전히 지어낸 것일 수도 있고, 멀리서 한 번 스쳐 지나간 사람의 모습을 빌려온 것일 수도 있다. 텍스트 속에서 이런 조각들이 모이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지만, 이상하리만큼 ‘진짜’처럼 느껴지는 누군가가 된다.
문학 이론은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름을 붙여 왔다. 이를테면, 작가를 연상시키는 인물이 등장하고, 실제 경험들이 작품에 녹아들지만, 전체로는 분명히 허구임을 드러내는 이야기를 ‘오토픽션’이라 부르기도 한다. 텍스트 속에서 ‘나’라고 불리는 인물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그 사람과 반드시 똑같을 필요는 없다. 그는 하나의 버전이며, 하나의 가능성이며, 하나의 가면이다. 자전적 서술과 완전한 허구 사이에는 명확하게 선을 긋기 어려운 중간 지대가 있다. 우리가 쓰는 많은 것들은 바로 그곳을 오간다.
이와 동시에, 이론 속에는 ‘작가의 죽음’이라는 유명한 문장이 있다. 롤랑 바르트는, 의미를 부여하는 중심으로서의 작가를 한 발 뒤로 물러나게 하고, 텍스트 그 자체가 서 있으면서, 독자가 각자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누군가가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읽는 과정에서 새로 생겨나는 의미들에 비하면 덜 중요해진다. 이 생각은 내게 위안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도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위안인 이유는, 내가 내 삶의 모든 세부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전인 이유는, 내 문장이 다른 사람들 안에서 어떻게 변해 갈지, 그것을 끝내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나와 내가 쓰는 텍스트 사이에 하나의 공간이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경험과 이미지, 기억들이 그 공간을 통과해야만 종이 위에 닿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그곳을 지나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실제의 개는 마야가 된다. 실제의 이름이 아니었음에도. 실제의 예술가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 사람에게 어울릴 법한 한 장면을 선물받는다. 실제의 친구 모임은, 매년 다시 달게 되는 파란 구슬 하나를 얻는다. 우리가 수년 동안 쌓아 온 무언가를, 한 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응축한 상징으로서. 다만 닭만큼은 그대로 남는다.
어쩌면 이것이, 작가와 작품 사이에 머무는 ‘영혼’인지도 모른다. 그 영혼은 자신의 삶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 오래 사랑했던 사람과 거의 알지 못했던 사람들, 직접 걸었던 장소와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채 상상만 했던 장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읽었던 책들과 보았던 영화들, 들었던 음악과 나누었던 대화들도 그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글을 쓸 때, 그 영혼은 현실과 텍스트 사이에 가느다란 실을 걸어, 결국 어디에서 현실이 끝나고 어디에서 텍스트가 시작되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지점을 만들어 낸다.
어떤 작가들은 이 경계를 아주 멀리까지 밀고 나간다. 등장인물이 거의 그대로 실제 사람을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이는 소설들도 있다. 그들의 삶, 이름, 상처까지도. 반대로 자신의 삶에서 거의 벗어나, 언어와 형식, 목소리 자체를 가지고 더 멀리까지 가는 이들도 있다. 대부분은 그 사이 어딘가를 걷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장면들은, 내가 스스로 인정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내 삶에 가까이 붙어 있고, 어떤 장면들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 „이거, 너 이야기야?“ 그렇게 물으면, 아마 이렇게밖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이야기의 한 조각이긴 해.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야.“ 모든 이야기에는 내 일부가 스며 있지만, 그 어느 이야기도 나 전체를 담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모든 텍스트에는 현실의 조각이 들어 있지만, 그 조각은 언제나 얇은 허구의 막을 통과한다. 그 막은 때로는 그 조각을 보호하고, 때로는 오히려 그것을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만든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재료이고, 텍스트는 그 재료들을 통해 작가의 영혼이 변형되는 자리라고. 그 변형은 언제나 자신의 삶보다 크면서도, 동시에 그보다 작다. 크다는 것은, 수많은 자기 목소리들이 그 안에서 함께 울릴 수 있다는 뜻이다. 작다는 것은, 결국 한순간에 불과한 한 장면, 한 번의 깜빡임 같은 조각으로 남는다는 뜻이다.